안녕하세요 님! 여지없이 음력 4월 1일이 찾아오면서 MoST도 벌써 세 번째 소식을 전합니다. 저희는 신상 입고에, 새로운 프로젝트에 정신 차릴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답니다. 그래도 구독자 여러분과의 약속은 지켜야 하는 법! 과연 어떤 주제로 이번 화를 꾸려야 할지 고민을 내린 결과... 가장 떠오른 건 '만우절'이었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진짜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소개하는 거죠.
그렇다고 '장국영이 거짓말같이 4월 1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같은 얘기는 뻔하잖아요. 그리고 너무 방대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더 사람들이 모를만한, 더 좁게 '패션'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가져왔습니다. 누가 봐도 거짓말 같은 스토리까진 아니지만, 분명 '어라...?'하곤 고개를 갸우뚱할 걸로 말이죠.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다가 언제 어디선가 써먹을 수 있는 세 가지 패션 이야기, 전직 패션 매거진 에디터가 한 번 꼽아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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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농구 유니폼을 만든 패션 브랜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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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한 자유를 부르짖은 타이다이 유니폼>
올해 남은 이벤트 중 가장 기대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 '파리 올림픽'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세계인의 축제라 불리는 만큼 많은 이의 눈이 몰리는 것은 물론, 각종 기업의 스폰서가 빗발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개중에서 각 국가를 대표하는 패션, 에슬레저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선보이는 '단복'과 '유니폼'은 매 대회마다 큰 이슈를 몰고 다닙니다.
그런데, 패션 브랜드가 단복을, 에슬레저 브랜드가 유니폼을 만드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오히려 패션 브랜드가 유니폼을 만드는 기상천외한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그 유니폼을 입고 메달(!)을 따는 기염을 토했죠. 그 주인공이 누구냐고요? 그 역사적인 순간에는 이름부터 생소한 '리투아니아(Lithuania)'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농구 대표팀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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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그보다 4년 전인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냉전의 끝을 향해 달리던 소련은 농구 종목 결승에서 세계 최강국 미국을 상대합니다.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소련의 승리! 언더독의 반란 끝에 거머쥔 금메달은 무엇보다 값졌지만, 누군가에게 그것은 한낱 금속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아래의 리투아니아 공화국 출신 네 명의 선수는 소련의 국기를 가슴에 품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오히려 설욕을 다짐했죠.
그로부터 2년 뒤인 1990년, 공식적으로 소련이 해체되고 리투아니아 역시 독립을 맞이합니다. 그렇게 찾아온 독립국으로서의 첫 번째 올림픽.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는 4년 전의 치욕을 씻고 진정한 자유를 증명할 완벽한 데뷔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만만치 않았죠. 아직까지 경제를 비롯한 국가 기반 시스템을 러시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러시아는 의도적으로 이들의 올림픽 출전을 방해했습니다.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비행기표와 체류비용은 물론이거니와 유니폼 한 장 맞출 수 없던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좌절할 순 없을 노릇. 바르셀로나로 향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선수들이 직접 발 뻗고 나섰고, 돌고 돌아 그 소식은 히피를 상징하는 미국의 밴드이자 오늘날 댄싱베어, 타이다이 패턴을 통해 하나의 패션 브랜드로 거듭난 그레이트풀 데드(Greatful Dead)에게까지 전해집니다. 자유를 향한 이들의 갈망은 그레이트풀 데드를 감동시키기 충분했고, 일정 후원금과 함께 직접 제작한 유니폼을 선물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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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폼은 운동복으로서 기능은 말짱 꽝이었습니다. 대신 디자인 하나만큼은 이들의 서사를 녹여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죠. 리투아니아를 상징하는 색인 노랑, 초록, 빨강이 자유롭게 뒤섞인 타이다이 패턴 위로 해골 캐릭터가 덩크를 꽂는 그래픽은 신생 독립국으로서 공산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리투아니아의 이미지를 더욱 고취시켰고, 이 유니폼은 올림픽 기간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본격적인 올림픽 일정. 수많은 역경과 고난 끝에 도착한 4강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만나 패배, 결국 동메달 결정전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요. 상대로 독립국가연합이란 이름으로 출전한 전 소련 대표팀을 맞이하게 됩니다. 외나무다리 위에서 만난 두 원수는 처절한 경기를 펼쳤고, 4년 전 소련에 금메달을 안겼던 선수들의 손끝으로 기꺼이 승리를 거머쥡니다. 4년 전의 금메달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진 동메달이었죠.
그 어떤 개성도 허락하지 않는 소련의 유니폼 대신 자유분방하고 개성 넘치는 유니폼이 단상에 오른 그 순간은 아직까지 회자되는 올림픽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단순히 시각적인 의류에 그쳤던 유니폼이 스포츠를 넘어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담아낸 순간으로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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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1992년 올림픽 이후 더 이상 그레이트풀 데드의 후원을 받지 않지만, 여전히 리투아니아 농구 국가대표팀은 타이다이 패턴을 유니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1992년 올림픽 리투아니아 국가대표팀 단복은 뜬금없게도 일본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의 손으로 만들어졌는데요. 그 배경에는 그의 엄청난 팬이자 당시 리투아니아 대표팀의 주치의가 있었습니다. 농구 대표팀과 마찬가지로 주치의는 단복을 만들어줄 디자이너를 찾고 있었고, 혹시 모르는 마음에 연락한 이세이 미야케가 제안을 선뜻 수락한 덕분에 거짓말 같은 협업이 이뤄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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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치 코트의 상징이 될 '뻔'한 휴고 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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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브랜드의 흥망성쇠를 가른 전쟁>
첫 번째 이야기가 너무 길었나요? 두 번째 이야기부터는 조금 짧게 가보려고 합니다. 혹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그럼, '전쟁은 패션의 어머니'라는 말은요? 들어본 적 없다고요? 당연할 겁니다. 방금 제가 지어낸 말이거든요. (하하...) 하지만, 그만큼 전쟁이 패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이어졌던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수많은 패션 아이템을 만들어냈는데요. 그중에 대표적인 하나를 꼽으면 '트렌치 코트'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블-브레스트 형태에 옷깃을 젖힌 곳에 단춧구멍을 내어 앞을 가릴 수 있게끔 되어 있고 같은 천으로 된 벨트가 달린 형태의 코트는 오늘날 가을을 상징하는 패션 아이템이자 세계 유수의 셀럽들과 함께 해왔는데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트렌치(Trench) 코트는 '참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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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국 남북전쟁에서 처음 등장한 기관총은 참호전의 시대를 열어젖혔습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9월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진격이 멈춘 후 장장 4년동안 움직이지 않는 지옥의 참호전이 펼쳐졌는데요. 습하고 추운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 진영은 그에 걸맞는 의복이 필요했고, 오늘날 트렌치 코트의 대명사로 불리는 버버리(BURBERRY)가 영국군 납품을 담당하게 되었죠. 이는 얼마 안가 다시 찾아온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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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포인트는 반대 진영인 독일군에게는 휴고 보스(HUGO BOSS)가 코트를 납품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보급한 나치의 군복은 실용적이진 못했지만, 특유의 날렵한 디자인만큼은 한 시대의 상징과도 같았죠. 하지만,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연합국의 승리! 종전 후 미군정은 나치 시절의 군복 디자인을 완전히 파기해 버리고 브랜드의 창업자는 부역 혐의로 기소되어 막대한 벌금형과 선거권을 박탈당하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휴고 보스는 2011년, 지나간 역사에 대한 사과를 담은 성명문을 발표하기도 했죠.
반대로 버버리의 트렌치 코트는 전 세계 모두가 옷장에 하나쯤은 걸어놓길 원하는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만약 소설 『The Man in the High Castle』 속 세상처럼 연합국이 아닌, 추축국이 승리한 역사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옷장에는 버버리의 코트 대신 휴고 보스의 코트가 있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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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창립자 이름이 북한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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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반대편에 남긴 흔적>
지난 2022년, 패션 씬 뿐만 아니라 사회면 뉴스까지 떠들썩하게 만든 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파타고니아(PATAGONIA)의 창립자 이본 쉬나드(Yvon Chouinard)가 한화로 4조 원에 달하는 본인 소유의 회사 지분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 것이죠. 여태껏 그가 끊임없이 설파해 온 '지구가 회사의 최대 주주'라는 말과 일치하는 행동이었지만, 그 규모와 실행력에 그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생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정말 다양한 요소를 꼽을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 20대의 경험 역시 꽤 큰 영향을 줬을 거라는 점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포인트는 그 배경이 미국의 고향 땅도,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지역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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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한창 파릇파릇한 20대 초반을 즐기던 그의 집으로 우편 하나가 날아옵니다. 그 우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징집영장. 당황할 겨를도 없이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자 나온 한 단어, 'KOREA'. 태어나서 들어본 적도 없는 태평양 넘어 이역만리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간장을 병째 마시며 현실을 피하려 했지만, 바뀌는 건 하나 없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한국으로 보내진 그는 복장 불량에 명령 불복종, 심지어 단식투쟁까지 벌이면서 일명 '고문관'으로 취급받게 됩니다. 심지어 변압기 스위치를 관리하는 하찮은 보직으로 발령받기에 이르렀죠.
힘든 나날을 보낸 그을 치유한 건 다름 아닌 '산'이었습니다. 주말마다 서울 곳곳의 암벽을 등반하며 자유를 만끽한 그는 암벽화나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코스를 개발할 정도로 산에 열심이었죠. 특히, 북한산 인수봉에는 길이만 177m에 이르는 그의 이름을 딴 코스가 있을 정도였답니다.
복무를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평생을 산과 자연에 보답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습니다. 요세미티 거벽등반과 알프스 빙벽등반의 고수가 되어 자신이 손수 만든 암벽 장비들을 판매하기 시작한 그는 60년이 흐른 후에야 '지구가 목적, 사업은 수단'이라는 원대한 문장에 온점을 찍으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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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아두면 쓸 데 있는 패션 잡학 사전'이었습니다. 이번 글을 읽으면서 님은 무엇을 느끼셨나요? 사실, 완독하신 분 중에서도 '이게 뭐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역시 있을 겁니다. 다만, 이번 화를 통해 제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패션'의 가치란 단지 눈에 보이는 시각적 요소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소개한 다양한 사례처럼요.
만약 이번 주제가 흥미로웠다면 꼭 피드백을 남겨주세요! 반응이 좋다면 또 다른 패션 TMI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혹시 몰라 아래에 이번 회에 소개하려고 했던 이야기 후보들도 남겨두겠습니다. 그럼, 다음 달에 다시 찾아뵐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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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이번 뉴스레터를 읽고 좋았던 점이나 아쉬웠던 점을 알려주세요! 님이 생각하는 '나만의 패션 잡학 지식'도 잊지 마시구요. MoST에서 다뤘으면 하는 주제를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MoST를 발행하는 건 저희지만, 만들어가는 건 '우리'입니다. 구독자분들의 의견을 통해 더 넓고 깊은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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